독립과 발명

강영승, 박영로 독립운동가 발명가 소개
  • 강영승 ( 1888.8.9~1987 )
    실용을 품은 교육자, 독립을 설계한 발명가
    강영승 선생은 1888년 평양에서 태어나, 1905년 하와이로 이주한 후 미주 지역에서 학생양성소 감독과 대한인국민회 시카고 지방회 부회장을 역임하며, 청년들에게 민족의식을 심는 교육에 헌신했다. 1909년부터 1945년까지 대한인국민회와 조선의용대 등에서 활동하며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고 조국의 해방을 위해 힘썼다. 이와 같은 공로로, 강영승 선생은 2016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 박영로 ( 미상 )
    낯선 땅에서 피운 혁신
    박영로 선생은 1914년 미국으로 이주해 샌프란시스코와 다뉴바 지역에서 활동했다. 흥사단 단원으로 추천되어 안창호 선생과 교류하였으며, 1915년 흥사단 재정 지출 문서 기록에 따르면 흥사단 내에서 행정 실무를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1919년, 필라델피아 한국통신부에서 서기로 근무하며 일본의 식민지 선전에 맞서 한국의 독립 의지를 전 세계에 알리는데 힘썼다. 또한,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에 525달러의 독립 자금을 송금하는 등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한 사실이 문서로 확인되었으며, 기록을 통해 그가 해외에서 독립운동과 발명 활동을 실천한 인물임을 보여준다
권도인, 장연송 독립운동가 발명가 소개
  • 권도인 (1888.9.27.~1962.4.24.)
    하와이에서 펼친 발명의 날개, 조국을 품다
    권도인 선생은 1888년 경상북도 영양에서 태어나 1905년, 대한제국이 외세에 시달리던 시기에 하와이로 노동 이민을 떠났다. 고된 노동 속에서도 민족의 미래를 고민하며, 1910년 대한인국민회 콜로아지방회 회장을 맡아 미주 한인사회를 결속시키고 가구점을 경영하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의 독립에 대한 신념은 일상의 기술로 이어졌으며, 그의 손끝에서 탄생한 발명은 개인적인 이익이 아닌 조국의 해방을 위한 실천이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9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으며, 2004년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안장되었습니다.
  • 장연송 (1901.1212~1956.10.30.)
    글과 도구로 지킨 조국의 뜻
    장연송 선생은 1901년 서울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유학한 후 발명과 사상 활동에 몰두했다. 1930년대에는 자유장, 이중봉침, 공중회전팽이, 무연료 원동력 환동기 등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물품을 발명하여 특허를 출원했다. 또한, 「선(善) 과 도(盗)」, 「사우(飼牛)가 시문(詩文)을 쓴다」 등의 글을 집필하여 인간사회 개혁과 조선 독립에 대한 희망을 표현하였으며, 이러한 저작 활동으로 인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실천적 독립운동가이자 발명가로서, 2006년 건국포장을 추서 받았다.
민족의 미래를 밝히는 힘, 발명 - 근대 발명 역사 소개
민족의 미래를 밝히는 힘, '발명'

근대 일제강점기 조선, 그 시대적 흐름 속에서 한국의 발명 역사는 어떻게 발전할 수 있었을까요? 1909년 정인호 선생은 밀총 모자 특허를 통해 한국인 최초의 특허권자가 되었다. 그의 특허는 개인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일본의 침략이 가속화되던 시기에 독립운동 자금으로 활용되며 헌신을 실천한 사례로 평가받는다. 1920년대는 어두운 시대였으나 발명인들은 민족의 자립과 발전을 꿈꾸었다. 그들은 과학과 기술이 민족의 미래를 밝히는 불씨가 될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1924년에는 김용관 선생이 발명학회를 설립하였다. 이는 조선의 발명가들이 실용적인 발명 활동을 통해 일본의 경제적 지배에 저항하고, 나아가 민족 산업을 육성하고자 하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일제의 탄압과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발명가들의 열정적인 발명 활동과 발명학회가 펼친 활약은 민족의 독립과 산업적 자립을 이루는 데 초석이 되었다. 국내뿐 아니라 먼 이국땅에서 활동을 이어온 수많은 발명가들도 그들의 발명으로 얻은 수익의 일부를 독립을 위한 자금으로 기여하며 힘을 보탰다. 이들의 꿈은 단 하나였다. 민족의 창의력과 선구자의 정신을 바탕으로 일본의 경제적 지배에 저항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발명가들의 불굴의 의지와 발명학회의 전통, 그리고 정신은 광복 이후 대한민국 발명 역사에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발명가들은 창의력과 열정을 바탕으로 민족의 독립을 향한 길을 걸었으며, 그들이 만든 발명품들은 그 정신과 꿈을 담고 있다
정인호 (鄭寅琥) 1869년~1945년

정인호

특허 : 종모자(1909년 8월 19일 출원)
특허공보에 따르면 정인호(鄭寅琥)는 경기도 양주군에 거주한 것으로 확인되며, 구 한국 특허 제133호를 확장하여 1909년 8월 19일에 종모자(騣帽子)를 특허출원하였으며 해당 발명은 1911년 3월 3일 일본특허 제19475호로 등록되었다. 본 발명은 한국 특허 제133호를 개선하여, 모자 전체를 말털로 편직하는 모자의 재료인 말털의 편직 방법에 관한 것이다. 본 발명은 안감, 차양 등을 부착하여 만든 물건으로서 가볍고 여름에 적합하며 용이하게 반복 세탁할 수 있다.
경기 양주(楊州) 사람이다.
1908년 ≪초등대한역사(初等大韓歷史)≫·≪최신초등소학(最新初等小學)≫ 등이 교과서를 저술하여 교육을 통한 구국운동에 앞장섰다.
1919년 3월에는 장두철(張斗徹)과 함께 독립운동에 헌신할 것을 결심하여 장두철은 상해 임시정부에서 활동하고 그는 서울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여 임시정부를 지원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1920년 3월 장두철이 상해로부터 파견한 이종만(李鍾萬)과 더불어 구국단(救國團)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동단의 단장을 맡았다.
이들은 임시정부 의정원의 사령서(辭令書)를 인쇄하여 윤용구(尹容求)·한규설(韓圭卨) 등 백여명의 국내인사들에게 원로(元老)·상원(上院)·중의원(中議院)의 각 의원에 추천되었음을 통지하였으며 홍긍섭(洪肯燮) 등 23명에게는 피선서(被選書)를 우송하는 등 임시정부의 지원활동을 폈다. 또한 새로이 김두형(金斗衡)·서병두(徐丙斗)·이종한(李琮漢) 등 수십명의 동지를 규합하여 납입명령서, 임시정부 재무부 인장, 임시정부의 국민의회 의원선임장 용지 등을 인쇄하여 전국의 부호에게 이를 배포하고자 하였다.
이들은 이후 독립운동 자금의 모집에 힘을 쏟았는데 1920년 4월에는 김두형·권영만(權寧萬)이 모의 권총을 소지하고 충남 논산군의 부호 윤일병(尹一炳)의 집에 침입하여 군자금 5백원을 모금하였다. 또한 그는 김두형과 함께 동년 12월(음력) 충남 익산군의 부호 임병철(林秉喆)에게 군자금 납입을 요구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일로 인하여 일경에 붙잡혀 1922년 5월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제령7호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5년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김용관 (1897~1967)

김용관

식민지 시대 과학대중화 운동의 선구자였던 김용관(1897~1967).
1924년 발명학회 창립을 주도했고, 1933년 우리나라 최초 과학 대중지인 '과학조선' 창간과 과학지식보급회 설립을 이끌었다. 정부는 2020년 김용관을 과학기술유공자로 선정했다.
/과학기술유공자 백과
일제강점기 요업기술자, 과학기술 진흥 및 대중화에 힘쓴 사회운동가.
호는 장백산(長白山) 서울 출생. 1897년 3월 21일 서울 창신동에서 유기 도매상 김병수(金丙洙)의 3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1913년 관립공업전습소(官立工業專習所) 도기과를 졸업한 뒤 경성공업전문학교(京城工業專門學校) 요업과에 입학하여 1918년 제1회로 졸업 그는 민족 산업의 독립적 발전을 추구하는 물산장려운동에 참여하는 한편, 1924년 박길룡(朴吉龍) 등 경성고등공업학교 동문을 규합하여 발명진흥단체인 발명학회(發明學會)를 창립하였다.
1928년 이후에는 조선물산장려회의 자매기관으로 설립된 고려발명협회(高麗發明協會)의 주도적 활동가로 활약하였다.
1932년 그동안 유명무실한 상태에 있던 발명학회를 재건했으며, 이듬해 일제강점기 대표적 대중 과학기술 잡지인 『과학조선(科學朝鮮)』을 창간 발명학회의 활력과 과학기술에 대한 조선 사회의 높아진 관심을 바탕으로, 김용관, 박길룡 및 그의 동료들은 1934년 과학의 날 행사로 대표되는 대중적 과학보급 운동을 전개하였다.
일제 당국의 탄압과 방해에도 성공리에 진행되던 과학지식보급회와 발명학회의 활동은 1937년 중 · 일전쟁 발발 이후 일제의 군국주의가 노골화되면서 점차 활력을 잃었다. 1939년부터 과학지식보급회는 급속히 친일적 단체로 변질되었고, 1940년 발명학회도 사실상 해체 < 2025. 1. 20. 홍보활동 보고내용 >